사이고 다카모리와 메이지유신

사쓰마번은 메이지유신이라는 커다란 변혁기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포함한 다수의 인재를 배출하여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사쓰마번만의 독자적인 교육제도와 조직체제, 네트워크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일찍이 서양 열강으로부터 외압을 받은 사쓰마번은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국내에서도 한발 앞서 서양식 제철, 제포, 조선, 방적 등을 도입하여 산업의 근대화를 꾀했습니다. 처음부터 막부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조정과 막부의 협력 아래에서 일본을 하나로 모아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나아간 것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개혁하여 근대 일본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이고 등 다수의 사쓰마번 출신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낳은 사쓰마번의 기풍

높은 학문 수준으로, 드높은 의지와 국가를 위해 한 몸 바치려는 마음을 품다.

사쓰마번에는 '고쥬(郷中, 향중)'라는 사쓰마번만의 독자적인 청년 교육제도가 있어 각 지역마다 단체를 만들어 연장자를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이고 역시 고쥬제도를 통해 리더십을 키워갔습니다.
에도시대 중기, 사쓰마번에는 번의 교육기관인 조시칸(造士館)이 세워져 무사의 자제들은 이곳에서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유학을 배웠습니다. 사쓰마번 학문의 특징 중 하나는 이론보다 실전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무사들은 스스로 행동하려는 마음가짐과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려는 마음을 익혔습니다.

가문과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번이 하나가 되어 행동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다.

에도시대에는 가문에 따라 맡을 수 있는 직책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부 말기의 사쓰마번에서는 유능한 인재가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하급무사였던 사이고 역시 시마즈 나리아키라에 의해 등용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나리아키라가 세상을 떠난 후, 사쓰마번을 이끌게 된 시마즈 히사미쓰 또한 사이고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하급무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세이추구미(誠忠組)에서 인재를 등용하였고 그중에서 메이지유신의 중심인물도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류큐(현재의 오키나와)를 통해 해외의 정보를 입수하여 일찍부터 서양 열강에 위기감을 느끼다.

간접적으로 류큐(현재의 오키나와)를 지배하고 있었던 사쓰마번은 서양 열강의 움직임을 독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로부터 해외 정보를 입수하는 루트를 만들어 열강들의 군사력과 기술력이 일본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보신전쟁을 앞두고, 사이고는 영국의 군사지원을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은 서양 열강이 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 첫걸음이 군사지원이라는 것을 사이고를 비롯한 사쓰마번의 지도자들이 독자적인 정보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막부 타도가 목적이 아닌, 일본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국가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다.

서양 열강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사쓰마번은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척하는 양이(攘夷)가 아니라, 국가가 하나가 되어 근대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보신 전쟁의 참모로서 군사를 지휘했던 사이고는 에도 총공격 전 막부 측의 가쓰 가이슈와 의견을 나눈 끝에 총공격을 중지하였고 에도성에 무혈입성(無血開城)하였습니다.당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에도는 메이지 유신 후 도쿄로 개칭되어 근대국가 건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